11월 13일(금) 밤 10시, 홀로 사시는 어머니께서 뜻밖에 전화를 하셨다. 깊은 한숨 소리가 들리고 이어 가느다란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매우 고통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전화 온 시간대도 매우 이례적이다. 밤 시간에는 좀체 전화를 하지 않으신다. 혹 자식이 불편할까봐, 통화 시간마저 세심히 따지는 어머니다. 그런 어머니께서 야심한(?) 밤 10시에 전화를 하셨다. "야야, 아프다. 날 좀 병원에 데려가 다오. 내일이라도."

내일이 토요일이니, 내가 출근하지 않는 날을 기다리다 전화했을 것이다.


까닭 모를 분노와 서러움이 치밀었다. 얼마나 참고 참았으며, 얼마나 망설이며 수화기를 들었을까? 찬바람 부는 겨울이 되자, 어머니는 척추관 협착증이라는 동네병원의 진단명으로 힘겹게 그 고통을 참아 오고 있었다. 동네 한의원을 찾아 침도 맞고, 동네의원을 찾아 무슨 뼈주사도 맞고, 진통제도 복용하면서 간신히 버티고 계셨다. 거동이 불편해서 가까운 동네 의원에서 치료 받으셨다. 내가 전화라도 하면 언제나 '괜찮다'거나, '오늘은 좀 낫다'식으로 말했다. 난 그 말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우리 어머니는 내가 없어도 건강하게 잘 지내는데, 뭘…'


참으로 영악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속이면서 그렇게 난 편안히 살고 싶었다. 불효라는 단어는 항상 멀리 있었고 깊게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용케도 그런 나의 심정을 꿰뚫고는 어머니는 적당히 그에 부응하셨다. 나의 걱정에 어머니는 언제나 잘 주무시고 식사도 빠짐없이 잘 챙겨 드신다고 말씀하셨고, 난 늘 그런 말을 억지로라도 믿고 싶었다.


어머니는 항상 배부르신 줄 알았다


변명 같지만, 내가 그렇게 된 것은 어머니 잘못도 있다. 장년이 된 지금도 정말 난 그렇게 생각하며 살고 있다.


우리 5남매를 키우실 때 늘 그랬다.


지금껏 어머니는 우리들에게 당신이 필요하니 뭘 좀 사 달라든지, 뭘 먹고 싶다든지, 어딜 가고 싶다든지 하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어릴 때도 그랬다. 난 언제나 배부르다거나 먼저 먹었다거나, 그거 잘 먹지 못한다거나, 춥지 않다 등등의 말만 듣고 자랐다.


내가 나서서 어머니를 위해 뭔가를 할 기회를 한 번도 주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홀로 되었을 때도 오히려 혼자 있는 게 편하다며 나와 아내의 속마음을 귀신같이 꿰뚫고는 먼저 독립을 선포하셨다. 직장인인 아내에게 오히려 짐이 될까하여 스스로 자신의 길을 만드셨다. 지금에서 난 효도가 뭔가를 생각해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어머니 없는 곳에서 차분히 생각하면, 내가 뭔가 어머니께 잘못 하고 있음을 알겠으나, 정말이지 어머니 앞에서는 딱히 내가 뭐가 잘못 되었는지 크게 깨달은 게 없다.


어머니 댁에 들러, 어쩌다 발견하게 되는 식은 밥덩이며, 말라붙은 김치나, 멀건 국물을 나는 별 생각 없이 쳐다보곤 하는데, 어머니는 나 없이도 강인하게, 현명하게 잘 살고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어서이다.


잘 몰랐는데, 오늘 부쩍 늙으신 어머니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어머니는 어느덧 80고개를 눈앞에 두고 있다. 새삼스레 참 많이 늙으셨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15여 년 세월을 홀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오랫동안 골다공증 합병증으로 고생하시고, 노인성 난청으로 보청기를 끼지 않고는 전화통화도 어렵다. 그런 까닭으로 나와 가까이 대면하고 나누는 대화는 점점 줄었다. 어두운 귀로 자식들 얘기 듣기 민망해 하는 어머니가 의도적으로 대화를 기피하는 듯하고, 나도 그런 어머니 앞에 굳이 나서서 대화를 해 봐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목소리를 높여 크게 몇 마디 외치고 나면 대화하고픈 마음이 저절로 사라지고 만다.


홀로 무료하게 시간 보내는 것이 언짢고 괜히 미안해서 근처 노인정에 자주 나가시라고 재촉해도 어두운 귀로 사람 대하기 힘들다고 손을 저었다.


나 또한 같은 시내에 살면서도 덤덤한 친구에게 전화하는 것보다도 어느새 덜 전화하게 되고, 찾아뵙는 횟수도 점점 줄었다.


어머니는 그처럼 홀로 고독한 섬에 점점 깊이 갇혀 갔다. 그러면서 자신의 감정과 고통을 참고 숨기는 데 선수가 되셨다. 나름의 생존법을 터득하신 것 같고, 자신의 계산법으로, 자식들마저 품에서 조금씩 밀어내고 있었다.


밤의 전화에서 어머니의 "너무 아프다"라는 말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나 자신이 실망스럽고 괜스레 아내마저 원망스러웠다. 뭔가 크게 잘못 되고 있음을 느꼈다.


이튿날 날이 밝자 뜻밖에 어머니가 또 전화를 하셨다. 엊저녁보다 다소 통증이 가셨다고, 괜찮으니 병원에 갈 필요가 없다는 전화였다.


순간 머리끝까지 분노가 솟았다. 지향 없는, 누구를 향한 분노인지도 헷갈리는 막연한 분노에 치가 떨렸다. 이건 아니다. 너무 아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머니는 나를 조금씩 떼어 내고 있었고, 나를 살가운 피붙이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배 아파 낳았다는 자식에 대한 천륜의 감정을 스스로 멀리 하고 있었다.


그게 내 탓일까? 어리석게도 나는 스스로 반문해 보았다. 어머니는 대를 이어 부양하는 전통적인 가족 관계의 틀을 스스로 부정했으며, 그것이 불행하게도 자신이 맨 먼저 받아들여야 할 시대의 숙명라고 자위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역정을 내다시피 큰 목소리로 어머니를 다그치고 척추 전문 병원을 찾았다. MRI(자기 공명 단층 촬영 장치)와 CT(컴퓨터 단층 촬영 장치)를 통해 본 어머니의 척추는 짐작한 바 그대로였다. 골다공증이 오래 진행되었다. 놀랍게도 척추 신경관에 종양이 발견되었다. 의사는 그 고통을 설명해 주었다. 죄스러움으로 어머니 곁에 서 있을 수 없었다. 더없이 초라하고 맥빠진 어머니가 지금은 그저 불쌍해서 못 보겠다. 나를 낳으신 나의 어머니가 지금 내 앞에 있는데, 나와 어머니 사이에 마지막 남은 희미한 끈마저도 이제 끊어지는 것인가? 하는 슬픔과 안타까움으로 마음을 진정하기 어렵다. 어머니란 단어가 새삼스러웠다.


"집에 통장 있다, 그걸로 병원비 대라"


복합 척추 질환, 근원 치료는 어려운 지경이었고, 우선 척추신경관에 있는 종양(오랜 세월 동안 자란 종양이 척추신경을 짓누르고 있었다)을 시급히 제거해야 하는데, 문제는 고령으로 인한 쇠잔한 기력이었다. 그럼에도 수술을 결정해 버렸다. 더 이상 아파하는 어머니가 싫어서다. 한 순간이라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드리고 싶었다.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행여 또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 가질세라 오랜만에 목이 아프도록 어머니를 달래야 했다. 어머니는 턱도 없이 다른 형제들에게는 알리지 말라는 말만 했다. 나의 어머니는 지금 순간에도 자신의 고통을 자식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다.


왜? 어머니는 철저하게 혼자이기를 바라는 걸까? 그 이유를 알 듯 말 듯 한데, 정말 속 시원히 알 수 있으면 마음이 덜 아프겠다.


시급한 수술이라 날짜를 최대한 앞당겨, 11월 18일(수)로 잡았다. 오전 9시 수술실로 향하는데, 수술실 문앞에서 갑자기 나의 손을 찾으셨다. 어머니는 울고 계셨다. 그렇게 강하시다고 믿었던 어머니께서….


어머니의 손에서 전류같은 찌릿함이 전해 왔다. 정말이지 피가 서로 통하는 것 같았다. 나의 피와 어머니의 피는 꼭 닮았을 터이다. 나의 어머니의 손이다. 실로 오랜만에 어머니는 나의 손을 찾았고,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사랑을 지천명의 나이에 새삼스레 느꼈다. 그리고는 나를 가까이 오라시며, 내 귓가에 속삭인다.


"아파트 어디어디에 통장과 도장이 있으니, 그 돈으로 내 병원비를 대라. 통장 비밀번호는 0000번이다."



얼마나 더 사실까? 나는 초조해진다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어머니의 여명(餘命)을 계산해 보았다. 길게 사시면 한 5년 더 사실까? 예전에 계산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지금 계산해 보고 있다.


내 마음이 자꾸 급해서이다. 어머니를 곁에 두고 미처 느끼지 못한 세월인데, 오늘 중요한 수술 앞두고 어머니의 생애가 더 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앞으로도 어머니는 지금까지의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여전히 고독한 성을 쌓고 자식에게 조차 폐가 되지 않으려는 의지를 불태울 것이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이미 굳어져 버린 어머니 나름의 삶의 방식과 마음을 돌이킬 자신이 별로 없다는 것과 어머니 없는 세상에서 내가 평생 동안 아프게 짊어지고 가야 할 지난 세월 동안의 나의 무심함이다. 그 날이 머잖아 올 것만 같아 두렵다.


어머니가 한 번도 그런 말씀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 무슨 마음에서인지, 결코 스스로 불효했다고는 끝까지 말 못하겠다.


수술이 진행되는 2시간 반 동안 모니터에 흐르는 현재 수술 환자 ○○○이란 어머니 이름을 한 시도 놓칠 수 없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가 저 수술실 안에서도 홀로 고독하게 누워 있다.





인터넷 뉴스에서 본 글.
이런 찡한 글을 볼 줄이야..
오늘도 엄마가 집에 반찬 갖다주러 오신다는걸 안 먹는데 괜히 온다고
투덜거렸던 나.

미안한거 알면서도 꼭 이렇게밖에 못하는게 아쉽다.
작은거 하나에 상처받는게 사람이고 엄마란걸 기억하자..

이 밑에 시는 댓글로 달려진 시인데..
정말이지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며 살지 않고 있나 싶다.
특히 아들들인 사람들은 딸보다 더 할거라 생각된다..
많이도 말고, 조금만 더 잘하자.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생각 없다,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 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떡없는
돌아가신 외할머니 보고 싶으시다고...
외할머니 보고 싶으시다고,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어머니를 본 후론...아!
어머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심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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